아마겟돈 타임(2022)
스포있음.
누군가 이 작품을 두고 성장물이라고 평한다면 그 사람에게 이 영화를 다시 보라고 권할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 본인의 자전적 회고가 담겨져 있는 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성장하지 못한다. 정확히는, 주인공이 성장하지 못함을 수용한다.
사실 이 작품은 꽤나 충실하게 평범한 성장물의 형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 '폴'에게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는 여러 모순으로 그를 압박한다. 배관공 출신인 폴의 아버지 어빙을 사위 받아들인 외할아버지는 손자 폴이 사립학교에서 좋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길 원하며, 우파 정치인을 싫어하는 가족들이 폴을 트럼프 가가 후원하는 학교에 보낸다.
또다른 전세계적인 전쟁이 도래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지배당한 시대 정서 하에 우연히 친구가 된 유대인 소년과 흑인 소년은 성장의 여정에서 좋은 동료가 될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는 함께 느끼고 있는 세계의 모순을 뚫고 각성할 일만 남았다. 남은 것은 성장 뿐이다.
그러나 폴이 사립학교로 전학을 가고 난 후, 그들의 성장 계획은 처참히 실패하고 만다. 폴은 자신과 죠니가 애초부터 다른 선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은 죠니와 다르게 부유하고 안정된 가족이 있었기에 세상의 모순을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폴은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겟돈의 시대 속에서 살아남는다.
카메라는 폴이 이를 깨닫기 훨씬 이전부터 그 사실을 조명한다. 나치 시대의 공포에 대해서 말하는 조부모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고 말썽을 피우는 폴은 애초부터 현재 차별적 혐오를 겪는 죠니와 대등한 동료가 될 수 없었다. 롱 샷으로 2층 방에서 자는 폴과 정원 바깥의 아지트 속에서 몰래 자는 죠니를 비춘 것도 상당히 의도적이다. 폴은 영화 내내 어른들과 세계, 심지어 그 바깥의 카메라로부터 성장을 규제당하고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위안이 되는 것은, 폴의 할아버지가 말해주었듯 불의한 상황을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 말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마지막에 폴이 부활절 파티를 빠져나와 바깥으로 나가길 선택한 것처럼 우리는 언젠가는 다시 그런 선택의 기로에 놓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되도록 성장하는 쪽으로, 올바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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