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25의 게시물 표시

미세리코르디아, 알랭 기로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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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리코르디아>에선 자동차가 목도하는 수많은 나무와 길들이 프레임 속을 메우고 사라진다. 보기만 해서는 이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불확실한 상황을 앞에 두고 자동차는 늘 예상치 못한 정차를 겪는다. 우선 제레미는 혈연으로 묶이지 않은 뱅상 아버지의 장례식에 도착한다. 우발적으로 뱅상을 살인한 후 그는 무작정 기차역으로 떠나고, 경찰을 피하기 위한 야밤의 도주는 필리프 신부에 의해 저지되기도 한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지리적인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풍경을 담은 차창으로, 스크린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은폐하려는 듯 보인다. 명확한 목적지가 없는 운전은 결국 제레미를 마을로 돌아오게 만든다. 정확히는 마을이 그를 붙잡는다. ​ 정해진 종착지가 없는 운전만큼이나 주인공 제레미 역시 알 수 없는 인물이다. 마을 사람들이 애착을 가질 대상은 사실 제레미보다는 출신이 명확하고, 혈연과 추억으로 연결된 뱅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에 거주하는 마르틴과 필립, 그리고 왈테르는 제레미를 필요 이상으로 두둔한다. 미지의의 숲속에서 뱅상이 죽은 자리에 버섯이 핀 이후로 살인 사건은 그 실체가 구체화되나 그들은 제레미의 은신처가 되길 자처한다. 그 과정에서 인물들이 서로 공유하는 섹슈얼한 욕망은 심화된다. ​ 여러 인물들의 얽히고 설킨 욕망을 다루는 과정을 통해 <미세르코르디아>는 자비와 사랑이란 개념을 파헤친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살인 사건을 해결하지 않을 것임을 드러낸다. 등장인물들 간의 과거를 밝혀 갈등의 이유를 명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가장 진한 파토스가 느껴지는 부분도 역시 제레미와 필립 신부의 대화에 있다. 목숨을 끊어 업보로부터 도망치려는 제레미를 설득하는 필립 신부의 어딘가 애절하고 격정적인 대사는, 알랭 기로디가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은 바와 닿아있다. 재밌는 점은, 기로디는 이러한 여정 사이에 기독교적인 요소들을 끼워넣는다는 사실이다. 도덕적 해이를 두고 과할 정도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고백하는 신부의 모습은 예수의 것과도...

이사, 소마이 신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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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이 신지에게 있어서 성장이란 것은 무엇일까? <태풍클럽>에서 성장은 고립과 불안, 폭력이 수반되는 일이었다. <이사>에서는 성장을 수용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사>의 성장은 곧 이전과 같이 살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은유로서 영화는 주인공인 '렌'이 부모님의 별거 이후로 전과 같이 지내지 못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녀의 어머니가 아무리 삶을 그대로 붙들기 위해 규칙을 정해놓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되기 일쑤다. 렌은 가족끼리 장을 보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홀로 제 몸만한 장바구니를 들고 저녁 찬거리를 고른다. 어른이 되면 예전과 같이 살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렌의 어머니에게 결혼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에겐 어머니의 연봉 상승이 그랬던 것 처럼. 렌 역시 부모의 별거를 힘들어하고, 가정을 이전의 상태로 돌리기 위해 여러 대책을 세운다. ​ 그러나 영화 안에서 이미 벌어진 관계와 성장이라는 마땅한 수순을 역행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기린 인형을 내밀지만 전달되지 못하고 결국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찰나에 걸린 슬로모션, 단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고도에서 걷지 못하는 렌과 그의 아버지. 영화는 시종일관 렌으로 하여금 성장과 변화를 받아들일 것을 종용한다. ​ 그렇다고 해서 <이사>가 불러들이는 변화가 '렌'에게 마냥 체념하라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초현실과 현실의 경계에 맞닿은 축제의 행렬로 '렌'을 이끈다. 교실에서 엎었던 알코올 램프로부터 시작된 불길은 축제의 분위기에 무르익어 이윽고 큰 화전으로 이어진다. 큰 볏짚과 논밭을 불로 태우는 것은 농경지에 남아있는 생명들을 사멸하는 일임과 동시에 새로운 작물을 심기 위한 수단이다. 또한 불씨를 맞는 인력들에 물을 수없이 끼얹는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기념해야"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역시 소마이 신지가 성장에 대해 가진 시각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