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소마이 신지 (1993)


소마이 신지에게 있어서 성장이란 것은 무엇일까? <태풍클럽>에서 성장은 고립과 불안, 폭력이 수반되는 일이었다. <이사>에서는 성장을 수용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사>의 성장은 곧 이전과 같이 살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은유로서 영화는 주인공인 '렌'이 부모님의 별거 이후로 전과 같이 지내지 못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녀의 어머니가 아무리 삶을 그대로 붙들기 위해 규칙을 정해놓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되기 일쑤다. 렌은 가족끼리 장을 보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홀로 제 몸만한 장바구니를 들고 저녁 찬거리를 고른다.

어른이 되면 예전과 같이 살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렌의 어머니에게 결혼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에겐 어머니의 연봉 상승이 그랬던 것 처럼. 렌 역시 부모의 별거를 힘들어하고, 가정을 이전의 상태로 돌리기 위해 여러 대책을 세운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이미 벌어진 관계와 성장이라는 마땅한 수순을 역행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기린 인형을 내밀지만 전달되지 못하고 결국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찰나에 걸린 슬로모션, 단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고도에서 걷지 못하는 렌과 그의 아버지. 영화는 시종일관 렌으로 하여금 성장과 변화를 받아들일 것을 종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사>가 불러들이는 변화가 '렌'에게 마냥 체념하라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초현실과 현실의 경계에 맞닿은 축제의 행렬로 '렌'을 이끈다. 교실에서 엎었던 알코올 램프로부터 시작된 불길은 축제의 분위기에 무르익어 이윽고 큰 화전으로 이어진다.

큰 볏짚과 논밭을 불로 태우는 것은 농경지에 남아있는 생명들을 사멸하는 일임과 동시에 새로운 작물을 심기 위한 수단이다. 또한 불씨를 맞는 인력들에 물을 수없이 끼얹는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기념해야"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역시 소마이 신지가 성장에 대해 가진 시각을 볼 수 있는 하나의 메타포일 것이다.

누군가는 성장이 이전의 상태를 파괴하는 자비 없는 변화라 말한다. 소마이 신지는 이에 대해 유보하지 않고 이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길에 더한 즐거움이 많을 것이라는 격려를 영화 내에서 아낌없이 쏟는다. (감동적인 엔딩크레딧 씬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점이 우리가 아직도 소마이 신지의 영화를 봐야할 이유라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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