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토,일 일정을 취소하여 4편의 작품만 보았다. 여러 경로로 못 본 작품들도 얼른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프레드릭 와이즈먼, <메뉴의 즐거움 - 트와그로 가족>

우리가 다큐멘터리를 통해 보는 것은 진실일까? 진실보다는 진실을 향한 누군가의 시선이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와이즈먼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시선이 어떻게 분배되는지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모든 것을 보여줄 필요가 없음"을 설득시키고 있다. 

그는 해당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포인트를 언급한다. 미셸 트와그로가 자신의 일본 여행 경험에 대해서 얘기하는 장면과 식당의 위치가 변경된 것에 대해 묻는 손님에게 대답을 해주는 장면인데 와이즈먼은 목도한 현실을 오로지 해당 장면을 위해 켜켜이 쌓아올린다.

카메라가 목격하고 있는 장면들은 전부 현실의 것이지만 (심지어 대부분의 장면은 롱테이크로 담담하게 촬영되어 상당히 진실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특정 순간에서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들뢰즈가 "거짓의 역량"이라는 용어를 들어 설명하듯 단지 진실에 비해 상대적인 거짓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흐트려놓는 것이다. 

가령 치즈공장의 대표가 치즈의 보관 방식에 대해 설명하며 "손으로 지우면 유통기한이 나타난다"는 것을 언급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다음 행위를 비추지 않고 곧장 노동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이 장면은 식당에서 직원들이 일하던 모습과 비교하면 무지 이질적이다. 생산지를 설명하는 사람들의 말을 신뢰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일 정도인데 사실 영화 안에서 그들의 말이 신뢰할 만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는 결국 미셸 트와그로의 미식을 향한 근본적이고 정직한 고집이 트와그로 가족의 식당을 성하게 만들었다는 결론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농지를 둘러보고 친환경 농법에 대한 설명을 들어도 결국 트와그로 가족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재료의 로컬함과 맛 뿐이고, 그들은 이미지와 스토리에 집착하지 않으니깐 말이다. 그 점을 공고히 하기 위해 주방 안의 모습은 오롯이 담고 그 밖의 모습들을 분산시켜 놓는 것이 보인다. 

그런 면에서 깔끔하고 잘 정리된 노련한 기자의 신문 기사를 읽는 것과 같은 감상을 받았던 것 같다. 4시간을 어떻게 견디나 싶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앞의 모든 부분이 결론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감동마저 느껴졌던 작품이었다. 


앙겔라 샤넬렉, <뮤직>

앙겔라 샤넬렉 영화는 이번에 처음 봤다. 부국제에서 본 작품들 중엔 제일 좋았던 작품이었고 좀 더 많은 얘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초반에는 빠르게 여러 쇼트들이 지나간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착안해낸 영화 답게 신화 속에서 아들이 아비를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하는 것처럼 이미 끝을 예고하는 듯 보이는 것 같다. 이후 영화는 대사가 거의 없는 공백과 같은 장면과 노래가 흐르는 장면을 오가며 진행된다. 공백은 보통 흐름을 깬다. "갑분싸"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대화가 없는 순간은 대체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뮤직>에서 공백은 연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내포한 장치이다. 대사가 없는 장면들에서 인물들은 서로를 생각하거나, 이어지거나, 이어지려 애쓴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공백은 서사적으로 건너뛴 순간들을 연결하기 위해 되짚는 도구로 기능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내 공백을 통해 이어지려던 수많은 시도는 적막을 깨고 들어오는 음악과 함께 예상된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때문에 예견된 비극이라는 소재의 특성 상 어떻게 보면 조금 지루할 수도 있는 비극의 순간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영화 안에서 음악이 기능하는... 움직임에 대해 논하고 싶은데 내가 역량이 부족해서 그것까진 못하겠다. 여튼 무지 좋은 영화였고 다들 전작보다는 못하다는 평이 많던데 전작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얼른 샤넬렉 영화를 다 보고 싶음


세이폴라 사마디안, <키아로스타미는 작업 중>

키아로스타미를 정말 정말 좋아하지 않는 이상 좀 아쉬운 영화인 것 같다. 
<쉬린> 재밌게 본 사람 (나라던가)는 그래도 좀 볼 만한 것 같고.. GV가 있어서 좀 아쉬움이 달래지긴 했는데 GV 없이 영화만 본다면 좀 지루하고 아쉬움이 클 것 같음. 그냥 정말 키아로스타미에 미친 사람이 아니면 굳이 볼 만한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리산드로 알론조, <유레카>

사실 비몽사몽한 상태로 영화를 봐서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알론소 감독이 영화 못 알아먹겠으면 다시 한 번 보라하던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음

같은 속성을 공유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묶으려 할 때 공통점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부분만 믿고 이야기를 전개하려는 나이브한 방식이 싫다. <유레카>에서는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연결 지을 때 유사한 줄기 아래 뭉뚱그려 담는 것이 아니라 고유함을 인정하면서도 포용하려는 것이 느껴져서 좋았다. 
물론 어찌 보면 가차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인물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않으려 하는 방식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다. 경찰관은 어디로 갔으며, 자살하려던 여인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아무도 알지 못한다. (나는 초반의 흑백영화가 왜 나왔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브라질의 밀림 마을에서 서로 다른 꿈을 나누는 의식으로 이어지려는 것처럼 꿈과 같이 개연성 없는 다른 얘기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움직임이 참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 의식을 현실과 등치시키고 분열하려다 죽음까지 이르던 밀림 마을의 남성처럼 이 난해하고 느린 꿈들에게서 개연성을 찾는 것은 오히려 폭력적인 일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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