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2023)
* 초고입니다 철자 오류 많음 *
미야자키 하야오를 내 식대로 설명하자면, 그는 훌륭한 동화작가이다. 실제로 그는 작품을 만들 때 아이들을 생각하며 임한다고 밝히기도 했기에 무리한 논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동화는 무엇인가? 동화는 아동이 성장하며 겪을 발달과업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비유를 통해 알려준다. 아이들은 도덕과 윤리를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어른들을 통해 그것을 당위로 받아들일 뿐이다. 동화는 이미지를 통해 아이들에게 당위성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 아이들은 동화 속 인물을 평가하거나, 이입하여 자연스레 사회적 합의들을 학습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하 그어살)를 동화라 생각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 접근을 해볼 수 있다. 우선 이 작품은 새로운 형태의 어머니를 받아들여야 하는 아동을 위한 동화이다. 마히토는 엄마의 죽음 이후 아버지와 함께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된다. 마히토의 아버지는 그의 이모와 이미 혼인관계를 맺었고 자식도 얻었다. 마히토는 어머니와 분리된 것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필사적으로 어머니를 되찾고자 한다. 약 3세 이전까지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던 전지전능한 어머니의 표상을 좇거나 쟁취하려는 남근기 남아의 모습은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속 인물들에게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이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의 리비도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하야오의 작품들 속에선 자애롭고, 전능하고, 초자아적인 여성 캐릭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벼랑 위의 포뇨> 그랑 맘마레이다.) 마히토는 상당히 두루뭉술하나 "여튼 이상적인" 엄마를 찾으려 숲속으로 발을 딛는다.
그러나 마히토가 찾고 있는 엄마는 그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히토의 엄마는 본체로부터 분리된 존재였으며, 현재 마히토의 엄마로 기능하고 있는 이모는 마히토를 저주한다. 마히토는 새로운 세계에서도 엄마를 찾을 수 없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이모와 함께 현실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아동을 위해 쓰인 동화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어살>은 상당히 흥미로운 동화이다. 엄마를 쟁취하려하는 아동을 굴복시키는 존재로 아버지(또는 그를 상징하는 남성적인 존재)를 등장시키는 동화의 고전적인 구조와 달리 <그어살> 속 마히토는 누구를 참고하지 않고 그저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그어살>에서 아버지로 대체될 수 있는 캐릭터들은 모두 실패를 맛보며 마히토를 굴복시키지 못한다. 마히토는 그저 청소를 마친 로봇청소기가 스스로 충전기로 돌아가듯 현실로 귀환하려 할 뿐이다. 그에게 일어난 변화가 있다면, 엄마가 죽었을 때도 아무 반항 없이 아버지에 의해 현실을 살아가던 때와 달리 스스로 추악한 현실로 돌아가길 선택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은 하야오가 기존의 동화처럼 명확한 교훈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관객에게 의문을 던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또다른 측면으로 보자면 <그어살>은 늙은 동화작가인 하야오 본인의 커리어를 집대성한 작품이다. 마히토와 그의 선조 모두 미야자키 하야오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감독 스스로도 밝혔듯 마히토는 그의 어린 시절을 반영하고 있으며 탑 속 세계를 창조한 그의 선조는 늙은 동화작가라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현재 신분에 걸맞는 이일 것이다. 탑 속 세계에선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간 담고자 했던 여러 코드들이 변주되어 흐른다. 사후세계, 전쟁, 창작에 관한 그의 묘사는 이전 작품들의 콜라주와도 같이 다가온다. 방대한 서사를 하나의 작품으로 함축하려는 하야오의 이미지는 곧바로 마히토의 선조에게 대입된다. 그는 오랜 기간 공들여 탑의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세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본인은 이제 한계가 왔음을 느낀다. 포스트 하야오에 대한 기대를 누구보다 많이 가졌을 하야오의 얘기 역시 작품에서 반영된다. 마히토의 선조는 자신의 자손에게 대를 이어주려 한다. 물론 위에서 설명했듯, 하야오는 그런 마음을 밀어붙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자 내면의 표상이며, 또는 관객을 상징하는 마히토라는 존재를 다시 현실로 밀어넣는다.
동화작가가 동화이면서 동화이지 않은 것을 써야 한다면, 아무래도 그 사람은 하야오 정도여야만 하지 않을까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나는 하야오의 온전한 동화를 좋아하지만, 자신의 커리어를 이렇게 콜라주하여 하나의 동화로 쓸 수 있는 것은 하야오 정도의 사람만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은 부정하고 싶지 않다.
난해하다는 해석이 많던데, 나는 오히려 상당히 직관적인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이 글을 쓰면서 <코렐라인>과 같은 동화의 형식을 띤 애니메이션들을 많이 떠올렸다. 새로운 "엄마"를 받아들여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바로 와닿는 얘기가 아닐까?
동화이면서도 은퇴작의 형태를 갖추기.. 라는 측면에서 <그어살>은 분명 아주 충실한 영화였다. 취향에 맞았는지와는 별개로, 그 점에 이견을 가질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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